‘혼합진료’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생소하지만 우린 일상에서 혼합진료에 노출돼 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와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를 섞어서 진료하는 게 혼합진료다.

혼합진료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유래했다. 일본에는 급여와 비급여 의료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는 걸 엄격하게 금지하는 ‘혼합진료 금지’ 조항이 있다.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안전성과 효용성이 있는 의료서비스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있는 만큼 효과가 떨어지거나 입증되지 않은 비급여 의료서비스가 마구잡이로 동시에 시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다른 주요 선진국에서도 요양급여 범위를 벗어나는 비용을 받거나 요양급여 외의 시술 또는 약품을 쓰고서 환자에게 비용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비용은 잔액청구(ballance billing)로 규정돼 프랑스나 캐나다 일부 지역에서만 일부 허용된다.

하지만 한국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직장 건강보험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재정 여력이 충분치 않아 약품이나 의료행위를 모두 요양급여 대상으로 두지 못했다. 그 결과 건강보험 급여와 비급여를 혼합해 진료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고, 비급여는 통제불능 상태로 남게 됐다. 이로 인해 의료기관은 수익성 높은 비급여에 집중하게 됐다. 비급여 영역이 계속 증가하는 이유다.

차라리 비급여만 하는 의료기관이면 건강보험에 미치는 영향이 적을 텐데, 이를 섞어서 제공하다 보니 건강보험 진료를 하면서 돈벌이가 추가됐다.

비급여에 의료기관의 운영이 좌우되다 보니 효과가 있는 의료서비스가 건강보험 대상에 포함되도록 노력하는 의사들도 줄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면 가격이 싸지고 보상이 적어진다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주요 선진국 의사들이 보험의 보장 범위를 넓히려고 애쓰는 것과 비교된다.

혼합진료를 금지했다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 항목만으로 충분한 치료가 이뤄지도록 필수 의료 분야에서 의사들이 노력하고 근거를 축적했을 것이다.

비싼 치료가 더 좋을 것이란 막연한 환상도 비급여 확대를 조장했다. 방송과 언론의 부추김도 한몫했다.

애초 혼합진료를 금지했다면 건강보험 영역은 근거 중심으로 발전하고, 건강보험 급여 항목만으로 의료기관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보상이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결과 건강보험 보상 수준은 낮고, 의료기관은 비급여로 수익을 벌충하는 기이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의료 영리화와 민간 의료보험 중심인 미국조차 환자가 계약한 보험 외 진료를 보상하거나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도 살 만한 나라가 됐고 건강보험재정도 규모가 있다. 경상의료비도 국민총생산의 9%를 넘어갔다. 따라서 앞으로 보편적 건강 보장을 넓히고 불필요한 낭비 의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혼합진료를 중단해야 한다. 국민도 급여와 비급여를 명확히 인지해 필요한 의료를 선택하는 실질적인 선택권을 되찾아야 한다.

2023-04-21 30면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421030003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건강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기대여명과 건강수명이 늘고 질환 치료율도 올랐다. ‘결핵 천국’으로 불릴 정도로 감염 질환 관리에 취약했지만 이조차 부족하나마 좋아지고 있다. 이런 양상은 보건의료체계보다는 영양·위생 상태, 교육, 노동조건 등 사회 조건이 개선된 영향이 크다.

건강 문제에 있어 의료영역 의존성은 생각보다 낮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으로 네트워크, 경제, 문화, 환경 등을 꼽는다. 합병증 감소와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보건의료제도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건강 문제에서는 개인보다 사회적 조건이 우선된다.

최근 건강정책에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건강 상황 개선의 요소였던 노동시간 축소에 제동이 걸리고, 대통령이 나서 야간노동을 장려하려 한다.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1928시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보다 300시간 정도 길다. 그나마 지난 10년간 200시간 정도 줄었고 여기에 야간노동, 특히 연속 야간노동이 부족하나마 감소하고 있었다. 긴 노동시간은 건강에 치명적이다. 휴식이 부족해 재생과 충전 시간이 없어지고 질병 상태가 악화하거나 회복이 더뎌지게 된다. 신체활동시간을 유지할 여유도 줄어 건강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신체의 재생시점을 망가뜨리는 야간노동은 최악의 질병 상태를 유발한다.

미국암학회가 야간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이유는 이런 까닭이다.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등산과 걷기, 요가, 자전거타기 등의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비율은 2006년 28.3%에서 2022년 45.5%로 늘었다. 이런 사회체육의 증가는 개개인의 건강 상태를 직접적으로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사회적으로도 네트워크를 강화한다. 토요일 휴무를 비롯해 실제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노동시간 문제는 단순히 일하고 쉬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사회 전반의 건강 문제와 직결된다. 수많은 근골격계 질환도 대부분 잘못된 자세와 누적된 노동환경 탓으로 볼 수 있다. 유럽이나 일본 수준으로 노동시간이 낮았다면 병원에 가기 전에 쉬면서 나아졌을 환자도 많았을 테다.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면 병원 내원도 줄어든다.

노동시간은 낮은 출생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육아 시간이 부족하고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도 없다.

하지만 노동시간 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도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 수준이다. 당장 노동시간과 유연근무를 늘리면 일부 개별기업은 이익을 보겠지만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은 어떻게 될지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당장 눈앞의 이익 때문에 개별기업의 효율성만 높이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무엇보다 지난해 말 대통령은 건강보험 재정 상태를 걱정하며 보장성 축소를 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건강보험 재정을 더 빠르게 고갈시킬 노동 유연화에 반대하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가. 우리 국가와 사회의 영속성을 감안하더라도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건강 문제로 재논의해야 마땅하다.<끝>

2023-03-10 30면

 

정형준 인의협 정책위원장 인터뷰 
"필수의료 수가 인상·정원 확대 맥 잘못 짚었다
'행위별 수가제'로 시장화된 의료체계가 문제
대만처럼 '총액계약제' 도입해 체계 바꿔야"

<16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위원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지금 같은 현실이라면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슬의생)'의 천재 이익준 교수나 99즈(주인공 5인방)라고 해도 대학병원에서 오래 못 버팁니다. 동네에서 척추 환자를 보며 과잉진료를 하겠죠."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의 해결책을 묻기 위해 16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위원장(원진녹색병원 재활의학과 센터장)은 대뜸 지난해 인기 드라마였던 '슬의생' 얘기를 꺼냈다. 그는 '슬의생'을 판타지로 만들어버리는 한국 의료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뇌 수술을 할 수 있는 필수의료 인력 부족 사태와 관련해 정 위원장은 일각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고난도 필수의료 수가 인상', '의사 정원 확대'는 "맥을 잘못 짚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사건의 본질은 필수의료 기피 현상을 부추기는 '행위별 수가제'에 있다고 지적했다. 행위별 수가제는 진료 행위 1건당 지원금을 매기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맹장수술과 개두술 수가를 각각 10만 원과 100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개두술 수가가 낮으니 200만 원으로 올리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 위원장은 "300만 원으로 올려줘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맹장수술을 받는 환자가 개두술을 받는 환자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대학병원 입장에선 맹장수술이 수익에 훨씬 도움이 된다. 비싼 돈을 들여 개두술을 할 의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정 위원장은 "복지부는 이번에도 수가 인상으로 해결하려고 할 텐데, 아무리 수가를 올린다 해도 구조적으로 수익이 나지 않는 필수의료 인력을 대형병원이 고용할 이유가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가를 높이는 대신 병원이 필수의료 인력과 인프라를 얼마나 확보했는지, 필수의료 서비스의 질을 평가해 연간 총액 단위의 지원금을 책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대만에서 시행 중인 '총액계약제'를 도입해야 병원이 필수의료에 신경 쓰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정 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의료체계 시장화된 한국·미국서만 발생할 사건"

 

<서울아산병원의 모습. 연합뉴스>

-아산병원 사건이 한국 의료계에 준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 주요국의 병원 순위를 매기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아산병원이다. 세계 최상위권 병원의 직원이 제때 치료를 못 받았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의 치료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 매우 심각한 사건이다."

-한국의 의료서비스는 최고 수준인데 왜 이런 구조가 됐나.

"한국 의료는 병원 비용만 절감하는 구조다. 건강보험공단은 보험자에게 병원비를 깎아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병원은 클리핑보다 맹장수술이 이득… 수술 줄면 의사도 줄어"

<이기일(오른쪽) 보건복지부 차관이 8일 서울아산병원에서 간호사 사망 사건과 관련한 정책 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의료단체는 필수·기피의료에 대한 수가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다시 비용 문제로 해결하겠다는 것 아닌가. 수가가 낮다, 높다는 이번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개두술 수가를 많이 올렸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일반환자 중 클리핑(뇌동맥류 경부클립결찰술) 수술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시장 논리에만 맡기면 아산병원 같은 대형병원이 이런 의사를 많이 고용할 필요가 없다."

-필수의료 분야에 그만큼 필요 의사를 배치하면 되지 않나.

"각 과의 인력은 복지부와 해당 학회가 결정한다. 그런데 '클리핑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몇 명 필요하다' 이런 구체적인 인력 계획은 없다. '신경외과 전체 몇 명' 이런 식으로 결정하는 구조를 '클리핑 전문의 몇 명' 이렇게 구체적으로 바꿔야 한다. 재작년만 해도 아산병원에 개두술이 가능한 교수는 4명이었다. 수술 건수가 줄고 처우가 나빠지자 2명으로 줄었다. 당장 돈이 안 되는 과의 의사는 대형병원을 나가 중소형 병원으로 가게 된다."

"의료서비스 질 높일 총액계약제, 정치권이 나서야"

<16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위원장이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현 의료체계 구조를 바꿀 대안 있나.

"상급종합병원의 지불제도를 총액계약제로 바꾸면 된다. 대만도 우리나라와 같은 행위별 수가제였는데 2003년 총액계약제로 바꿨다. 의료기관에 주는 지원금을 의료서비스 총액으로 계산해 연간 예산으로 주는 방식이다. 대신 필수의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지, 응급의료가 잘 작동했는지 등 서비스 질만 평가하면 된다. 정부가 심혈관센터를 짓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총액계약제가 되면 의사들이 강하게 반발할 것 같다.

"한국처럼 의료 행위에 인센티브를 주는 나라는 몇 안 된다. 총액계약제가 도입되면 인센티브가 많이 감소하게 돼 의사들은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결국엔 정부가 나서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류호 기자 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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