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보험에 직불제 허용? ‘판도라 상자’ 기어코 여나

‘의료개혁’으로 포장된 의료 민영화 ②

정형준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처장

의료대란이 한국 사회의 보건의료 쟁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 의사 인력 외에 시급히 대처할 과제는 많다. 국민이 감내하는 의료대란 고통을 더 나은 의료제도로 나아갈 마중물로라도 보답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의 준동으로 거꾸로 가고 있다.

민영보험은 이번 대란에서 자신의 지위를 건강보험을 대체하는 수준까지 상향시키려 한다. 정부가 8월 발표한 ‘의료개혁실행방안’을 보면, 향후 개발되는 실손보험은 병원과 직계약을 할 수 있다. 현재 민영보험은 환자가 의료비를 모두 의료기관에 내고 사후에 보험사에 개개인이 청구하는 구조다. 반면 건강보험 진료는 환자는 본인부담금만 직접 의료기관에 내고, 나머지는 건강보험공단과 의료기관이 해결한다. 이를 ‘직불제’라고 한다. 지금까지 민영보험과 의료기관의 직불제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의료기관과 보험사의 담합 혹은 종속관계를 막기 위해서다. 실제 건강보험은 직불제를 통해 건강보험 진료 내용을 심사평가하고 가격도 결정한다.

그렇다면 민영보험이 직불제를 시행하면 어떻게 될까? 우선 비급여 가격을 의료기관과 결정한다. 혹자는 싸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환상이다. 특정 비급여는 자사와 계약한 의료기관에서만 저렴하게 공급하는 미끼상품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총수익에서는 각자의 이익을 최적으로 하게 된다. 결국 비싼 보험료를 내는 민영보험에 가입하면 비급여 가격이 싸질 수 있지만, 싼 민영보험에 가입하면 보장 내용에서 제외될 수 있다. 현재 실손보험도 보장 제외를 조건으로 가격이 싼 경우가 많다. 평균 가격은 민영보험사와 민간 병원이 최적의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곳에서 결정된다. 건강보험이 최대한 가격을 낮춰 국민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다 민영보험사는 환자의 진료정보도 심사평가를 명목으로 다 가져갈 수 있다. 현재도 건강보험공단의 개인건강정보 빅데이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직불제가 성사된다면, 보험사는 공단 빅데이터 말고 직접 환자들의 개인진료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민영보험이 민간 병원과 계약을 맺고 진료비를 대납하고 심사평가를 추진함으로써 사실상 건강보험과 동등한 지위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현재도 실손보험은 4천만명가량이 가입해 금융위원회가 “제2의 건강보험”으로 광고까지 해주고 있다. 실손보험에 많은 사람이 가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아 아직도 의료비 부담이 만만치 않아서다. 그런데 실손보험이 별도의 비급여 항목에 대한 경쟁형 보험으로 의료기관과 계약까지 한다면 그때는 4천만명이 아니고 빈곤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가입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또 특정 민영보험과 계약한 특정병원은 더 높은 보험료를 감내할 환자들만 받을 수도 있다. 의료의 부익부 빈익빈이 한층 더 강화된다.

민간 병·의원의 과잉진료와 과다 비급여 사용을 민간 보험이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실손보험이 출시돼 비급여시장은 확대됐을 뿐 실손보험의 각종 규제가 비급여를 줄인 바는 없다. 민영보험과 민간 의료기관은 서로를 강화해주는 공생관계다.

우리는 민영보험이 의료기관과 계약하고 의료비를 결정하고 심사하는 게 만연한 나라를 알고 있다. 다름 아닌 미국이다. 미국식 의료제도의 제일 큰 문제는 건강보험이 없고 민영보험이 의료기관과 직계약을 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조합보험에 가입한 서민들은 조합 계약 병원만 가고, 비싼 보험에 가입한 부자는 고급 병원에 간다. 반면 민영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시민들은 집에서 약만 사 먹는다. 보건의료제도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과거의 잔재다. 지금 의사들의 저항도 민영의료 공급을 방치한 결과다.

미국처럼 한번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윤석열 정부가 추진 중인 민영보험 활성화 정책은 결국 민간 보험의 기득권을 강화시켜 이후 제대로 된 건강보험 개혁을 할 수 없는 방해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 윤석열 정부 같은 친시장주의 정부를 한번 더 만나면 미국처럼 될 가능성도 크다. 현 정부는 이 지점에서 건강보험을 위협할 ‘의료 민영화’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려는 것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164760.html

 

의사들 돈 좇게 만든 나라, 국민 돈 터는 민영보험

그 많던 전문의들은 어디로 갔나 [왜냐면]

 

진짜 ‘의료 개혁’ 위한 연속 기고 ③

정형준 |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재활의학과 전문의

2010년 이후 10여년간 상급 종합병원은 1500명가량 의사가 늘어난 반면, 의원급 종사자는 1만명가량 늘어났다. 매년 3000명가량 배출한 의사 대부분이 개원의가 된 셈이다. 그 결과 중환자를 돌봐야 하는 병원에서는 의사, 특히 전문의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왜 한국에서는 전문의들이 개원의가 되는 걸까?

우선, 대형병원들은 수익성이 낮은 진료과목의 전문의를 고용하지 않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흉부외과, 뇌신경외과, 소아과가 이에 해당한다. 응급환자가 늘어도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더 고용하지 않는다. 응급실 뺑뺑이가 시작되는 첫 번째 길목이다.

반면 내과 계열과 통증·근골격계 의사들은 병원이 고용하려고 해도 개원가 소득이 높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개원가는 영양주사, 도수치료, 비급여 시술 같은 것들로 수익을 창출할 여지가 많다. 피부·미용 시장의 팽창도 원인이고, 탈모, 비만, 영양 등 이른바 관리의료 시장의 창출도 개원가 쏠림을 크게 부추겼다.

지난 20여년간 의료 상업화가 의사 공급의 불균형을 심화시킴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로잡아야 할 정부들은 모두 “의료 선진화”, “신성장 동력” 운운하며 의료 시장화를 가속했다. 의료 시장화의 천국인 미국을 제외하고, 복지제도로서 의료에 대한 이해가 있는 나라 대부분은 신의료기기나 치료 재료를 그 효능과 위험도를 엄밀하게 평가해 규제하는 데 반해, 한국은 신의료기기에 대한 안전성 평가를 무조건 간소화해 왔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안전성 평가는 나중에 하고 시장에 먼저 진입시키는 ‘선 진입, 후 평가’까지 추진한다. 그래서 개원의들이 할 수 있는 비급여 시술의 종류와 양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공급자 주도의 도덕적 해이인 것이다.

사례를 하나 보자. 지난해 7월 허가된 무릎관절 자가골수줄기세포 주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광고를 통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3만원짜리 연골주사와 비교해 별 차이도 없는 치료 대안이 규제도 없이 광고로 퍼지는 것도 문제지만, 환자들이 내는 수백만원이 의사들의 영리적 개원가 쏠림을 부추겨 의료 공급구조를 왜곡시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두 번째 핵심적 문제가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데, 이런 고가의 비급여 치료가 빠른 속도로 퍼지게 만드는 민영의료보험 시장의 엄청난 확장이다. 4000만명 이상 가입한 실손의료보험은 이런 비급여 시장을 창출하는 미다스의 손이다. 비급여 진료를 중심으로 하는 병·의원들이 실손보험 가입 여부를 물어보는 것은 상식이다. 자궁근종 치료 등에 선택적으로 활용되는 수백만원의 하이푸 치료도 의사가 아닌 상담사가 실손보험 가입 여부를 묻고는 적극 권유한다. 보험상담사가 무릎관절 유전자 치료제로 광고했던 수백만원짜리 가짜 약 ‘인보사’도 같은 사례다. 모두 실손의료보험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들이다.

이 와중에 윤석열 정부는 실손의료보험 이용을 장려하는 ‘실손보험청구간소화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오는 10월부터는 민영보험사가 환자 개인의료정보를 축적해 보험사에 이익이 되도록 보험 가입과 보험금 지급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의료기관은 실손보험 가입자에게 낭비적 진료를 더 늘릴 것이다. 엄청나게 증가하는 비급여 시장은 의사와 정부 모두 책임이 있다.

시장 중심 공급구조로 비급여 진료를 부추기고 실손보험을 활성화하는 정책은 한국 의료를 기형적으로 만드는 원인의 원인으로 작동해 왔다. 그 결과 응급, 중환자, 수술 진료에 집중해야 할 의사들의 개원 붐이 일어, 이제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들도 집단 개원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일차의료기관 역할을 해야 할 동네의원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한 시장 경쟁으로 내몰려 고가 임대료와 인테리어 비용 등을 환자 주머니에서 회수해야 하는 사업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의료 대란을 해결하려면 의료의 본령이 무엇인지를 논의해야 하고, 공적 사회서비스로서의 의료를 되찾아야 한다. 이제 비급여 통제, 실손보험 규제를 통해 정상적인 일차 의료로서 동네의원을 복원해야 한다. 이게 의료의 공공성이다.

마지막으로 일본도 의사들의 개원 자율권을 인정하지만 민간 사업체처럼 운영하도록 놔두지는 않는다. 강력한 비급여 규제인 ‘혼합진료 금지’가 사회적으로 합의돼 있어 일본 의사들은 비급여가 아니라 필요한 의료행위는 모두 급여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혼합진료 금지’는 영리적인 한국의 외래진료 서비스를 바로잡을 최소한의 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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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공적의료보험이 시작된 지 45년이 됐다. 전국민건강보험이 시작된 지도 35년이고, 단일보험자인 국민건강보험으로 나아간 지도 24년차다. 단연코 건강보험은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사회복지제도다. 때문에 2008년 이명박 정부 인수위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및 축소 방침 보도는 '의료민영화 반대' 물결이 됐고, 당시 광우병 촛불시위의 주요 의제 중 하나였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영리자회사 도입 등 연성 의료민영화를 시작했을 때도 정부는 '건강보험을 지키겠다'는 홍보물을 만들어 의료민영화는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국민의 '건강보험 사랑'이 있어 시장만능주의 정치인이라도 건강보험을 감히 건들겠다는 정책을 자신 있게 펴지 못한다. 약한 수준의 의료민영화 발언도 정치인에겐 치명적이다. 건강보험을 강화하겠다는 주장은 많지만 건강보험을 축소하거나 건강보험영역을 민영화하겠다고는 쉽게 말하지 못 한다. 하지만 한국의 건강보험이 마냥 안전한 것은 아니다. 드러내놓고 건강보험을 공격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잠식하는 방식으로 건강보험을 훼손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건강보험의 발전과 성장을 바라지 않는 적들은 여전히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건강보험 잠식하는 민영보험

우선 건강보험의 축소를 원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민영보험사(금융자본)들이다. 민간 금융자본은 미국식 의료제도인 민영의료보험 중심의 의료보장제도를 바란다. 물론 당장 이런 제도로의 전환은 의료민영화 자체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민영보험사는 조금씩 건강보험을 잠식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째로 보충형 보험인 실손의료보험을 확대해 왔다. 현재 한국의 실손의료보험 가입자는 4000만 명을 넘었다. 재정 규모도 정액보험을 제외하고도 연간 25조 원에 육박한다. 건강보험의 1/4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고작 10여 년 정도가 걸린 셈이다. 건강보험을 방치한다면 현재의 성장 속도로 건강보험 총재정의 1/2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둘째는 민영보험 시장 확대를 위해 건강보험의 보장영역을 축소하려 한다. 윤석열정부가 지난해 인증한 '비의료 건강관리서비스'를 보면 고혈압, 당뇨 등의 만성질환관리는 민영보험사와 연계된 사기업이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다 국민건강보험법상 건강보험이 해야 하는 건강증진, 예방 등의 사업도 사기업이 하도록 전환하려고 하는데, 애초에 '건강관리서비스'업 자체가 미국에서 보험사들이 운영하는 사업이란 점을 본다면 그 본질은 더 명확하다.

셋째는 의료기관과 민영보험의 직불제 추진이다. 미국처럼 의료기관과 민영보험사가 직접 의료비를 전달받는 체계는 민영보험확대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1단계인 '실손보험 청구간소화'라는 진료기록의 보험사전송의무 법안은 얼마 전 국회를 통과했다. 보험회사와 금융 관료들은 이를 국민 편의를 위한 것으로 포장했지만, 그 본질은 보험회사와 의료기관의 직접 연계를 통해 직불제로 나아가려는 시도다.

이처럼 민영보험은 지난 30여 년간 건강보험의 보장 범위를 제한하고, 건강보험의 관리 영역을 침범하고, 의료기관과 직접 진료 정보를 교류하려 했다. 끝으로 미국식으로 의료기관에 직접 의료비를 제공해 직계약을 맺고자 야금야금 건강보험을 잠식하고 있다. 문제는 애초에 건강보험의 보장률이 높다면 이런 시도는 어려웠을 것인데, 한국의 보장율은 OECD 꼴등 수준으로 답보상태다. 보장률이 낮아 국민도 울며 겨자먹기로 실손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윤 대통령, 건강보험 재정 공포 조장
건강보험을 공격하는 민영보험사와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정부도 한몫한다. 윤석열정부는 OECD 꼴등 수준의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기는커녕, 이전 정권 공격을 위해 보장범위를 줄이려는 최초의 정부다1). 여기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건강보험 재정파탄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2). 실제 한국의 건강보험 총재정은 국민총의료비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현재 총의료비가 연간 220조 원가량인데, 건강보험 총재정은 고작 90조 원 정도다. 낭비 없는 건강보험 재정관리가 중요하다고 국민 직접의료비를 줄일 수 있는 건강보험 재정확대를 방기하는 건 앞서 밝힌 민영보험사만 좋은 정치다.

여기에 '약자복지'를 말하면서 병·의원 이용이 과다한 극소수 환자들이나 외국인 가입자들에 대한 보장 수준을 축소하려 한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문제해결을 위해 시범 사업 중인 '한국형 상병수당제도' 예산도 삭감했다.

결국 건강보험 재정을 건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의료공급 부분에 대한 개혁이나 지불제도개편 등은 방기하고 건강보험 재정을 쥐어짜겠다는 시도만 하고 있는 셈이다. 건강보험재정 파탄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기에 앞서 법에 약속된 건강보험 국고 지원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일말의 일관성이라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윤석열 정부도 여전히 국고 지원을 기대수익의 14%에 훨씬 못 미치는 11% 수준으로 하고 있다.

대통령이 나서서 건강보험 재정 공포를 조장하고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포퓰리즘'으로 몬다는 건 사실상 민영보험 활성화란 점에서 나쁜 정치다. 아마도 스스로 사회서비스의 시장화3)를 주장했던 수준으로 노골적인 민영보험 활성화를 외치기에는 국민 정서와 여론을 살핀 듯하다. 하지만 그 본질이 진정한 건강보험 재정 건정화가 아니라 민영보험 살찌우기라는 건 건강보험 국고 지원액 축소, 보장 범위와 대상 축소, 공공의료 방기 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재정 관료들의 악행 

끝으로 민영보험사와 윤석열 정부의 나쁜 정치를 연결시키는 고리는 재정 관료들이다. 이들 재정 관료들은 민영보험사와 카르텔을 이뤄 건강보험의 성장을 막고, 민영보험 활성화를 위해 지난 30여 년간 노력해왔다.

우선 앞서 이야기한 건강보험 국고 지원을 누락해 건강보험 재정 확대를 막고 재정 위기를 초래했다. 사회보험시절(2000년까지) 지역가입자의 보험재정 국가납입분도 한 번도 제대로 납부한 바 없었고, 이를 승계한 국민건강보험의 국고 지원액도 매년 누락했다. 이 누락분만 가입자들의 보험료 징수처럼 소급해서 제대로 했다면 건강보험 보장성이 5포인트 수준은 상향됐을 것이다.

재정 관료들이 그간 건강보험 국고지원을 계속 누락한 이유는 건강보험 재정 위기를 초래해 보장률을 답보 상태로 만들고, 전반적인 공보험 비중을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실손보험의 시장 장악력이 올라가자 정부부처인 금융위원회가 나서서 '실손보험은 제2의 건강보험, 건강지킴이' 광고를 한 것은 이런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일례다. 여기에 최근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로 진료 정보를 수집하는 곳으로 민영보험사들의 손해율을 계산하는 '보험개발원'을 상정한 것도 금융위원회와 재정 관료들이다.

재정 관료들은 정권이 바꿔도 용어를 바꿔가면서 건강보험 재정 긴축을 획책하고, 건강 영역의 민간금융시장의 확대를 위해 노력한다. 문재인 정부가 문재인 케어라는 보장성 강화안을 내는 상황에서도 금융위원회는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등의 건강 상품화에 앞장섰다. 2014년에는 '2060재정전망'이라는 공포 마케팅을 하면서 건강보험 누적 적자가 2040년에는 600조 원이 넘는다는 보고서를 낸 것도 재정 관료들이다.

최근에 KDI를 통해 지방의료원 신축 경제성 평가를 통해 대통령 공약인 공공의료기관 설립을 무산시킨 것도 역시 재정 관료다. 재정 관료들이 재정공포와 긴축재정을 추구하는 체계는 모든 사회보험에 미치는 영향이 비슷한데, 그 결과는 결국 민영의료보험과 사적연금 시장의 확대로 나타났다.

일본에서 배울 것

이처럼 건강보험을 야금야금 공격하고 소극적인 건강보험 정책을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한국에서 30여 년간 해온 일은 건강보험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민영보험사, 윤석열 정부, 재정관료 같은 강력한 자본과 정치 집단이 한국에만 있지는 않다.

가까운 일본을 보면 아베를 위시한 일본 신우파정부(자민당 신우파)와 일본민간보험사도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지는 않았는데, 이는 일본의 건강보험이 매우 높은 보장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실손보험이 팔리지 않는다. 또한 일본은 의료공급자들이 건강보험진료와 비급여진료를 섞어서 하지 못하도록 '혼합진료금지'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민간의료 공급자들인 의사들조차 아베 정부의 민영보험활성화, 신의료기술활성화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건강보험의 약한 고리인 낮은 보장성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건강보험의 적들이 암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건강보험 제도는 1980년대 노동자대투쟁으로 전 국민으로 확대됐고, 의료보험 확대를 위한 투쟁의 성과로 2000년 국민건강보험의 단일보험자로 성장해왔다. 아직도 한국의 건강보험은 갈 길이 멀다. 가까운 일본의 입원 보장률 92%에 비해 한국은 67%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부가 늘어나도 답보 상태인 건강보험 보장성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건강보험의 적들 때문이기도 하다.

다행히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민영화 반대를 기치로 투쟁에 나서고 있다. 노동자 투쟁으로 건강보험의 적들을 조속히 패퇴시켜주길 바란다. 그 혜택은 극소수 부자들을 제외한 모든 노동자와 서민에게 돌아갈 것이다.

[주석] 
1) '보장성 강화정책은…. 인기영합적 포퓰리즘 정책' 2022년 12월 13일 대통령 국무회의 모두발언 중
2) 2040년 재정적자가 678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2022년 12월 14일 대통령실 설명(건강보험보장성 축소를 대통령이 밝힌 데 따른 답변)
3) "이 사회보장 서비스 자체가 하나의 경쟁이 되고, 시장화되면서 이것이 산업화된다고 하면, 이거 자체도 우리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또 팩터(factor)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좀 많은 재정을 풀어서 사회보장을 부담을 해 주려고 하면, 그러면 사회보장 서비스 자체도 시장화가 되고, 산업화가 되고, 경쟁 체제가 되고 이렇게 가야 됩니다. 그냥 뭐 사회적 기업이다, 난 사회보장 서비스로 한다, 그래서 일률적으로 거기에다가 돈 나눠주고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그거는 그냥 돈을 그냥 지출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시장화되지 않으면, 그것이 성장에 기여하는, 그런 성장 동력이 되지 않습니다."(사회보장 전략회의 모두 발언 2023.5.31)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형준씨는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입니다.

미국 드라마를 볼 때마다 의료문제가 인상 깊다. 마피아들이 민영 보험료를 깎기 위해 기업에 거짓으로 취직해 이름이라도 걸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면, 보장 범위가 더 넓은 보험 가입을 조건으로 임금인상을 양보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미국에서도 민영보험 문제는 풍자의 대상, 조롱거리다. 미국의 저소득 노동자, 흑인, 이주민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단연코 높은 의료비다. 직장에서 해고됐을 때도 소득 손실보다 병원에 갈 수 없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혹자는 미국도 한국처럼 공보험을 만들면 되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런 노력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민영보험 시장이 너무 커져 공보험을 도입하기에는 정치적·재정적 부담이 막대했다. 민영보험사를 국유화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고, 작게나마 공보험을 시작해 커지면 민영보험시장 잠식 문제로 민영보험사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했다. 미국 정치권이 민영보험사에 포섭돼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미국의 65세 이상은 메디케어라는 공적보험이 있다. 이는 민영보험사가 수익성이 없다며 공보험에 양보했기에 가능했다. ‘오바마 케어’ 역시 기본 민영보험 상품이라도 가입하도록 강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미국의 높은 의료비, 높은 보험료, 차별적인 의료 이용의 핵심 배경은 민영보험 체계다.

이런 이유로 2008년 이명박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민영보험 활성화 정책을 발표했을 때 결사반대 목소리가 컸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민영보험 활성화가 의료민영화라는 것을 시민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민영보험사들은 민영보험 활성화 정책을 여러 모양으로 포장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최근 국회에서 논의 중인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정책이다. 이름만 보면 ‘청구 간소화’란 편의성에 중점을 둔 정책으로 보이지만 민영보험사가 진료 정보를 전산으로 수집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게 핵심이다. 민영보험사가 개인 건강정보를 갖고 싶어 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평균 손해율을 계산하고, 지불 또는 가입 거절 등에 활용하고 보험료 담합을 하기 위해서다. 이는 민영보험 활성화에 큰 도움을 준다. 병원과 민영보험의 직접 연결 고리도 된다.

국가기관의 인정을 받은 민영보험이 의료 체계에 깊이 침투하면서 낭비도 커졌다. 공보험 보장률이 답보 상태인 큰 이유 중 하나는 실손보험이 부추긴 비급여 진료 때문이다. 민영보험은 이제 건강보험과 비슷한 지위와 역할까지 요구한다.

윤석열 정부는 기업이 만성질환 관리를 하도록 건강관리 서비스를 인정하고, 기업 플랫폼이 비대면 진료를 중계하고, 이들 사업에 민영보험사도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민영보험사는 청구 간소화란 명분으로 진료 정보까지 전산 수취하려 한다. 게다가 이런 논의는 보건복지부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도 아닌 금융위원회, 산업자원부가 주도하고 있다. 공보험에 미치는 영향 평가조차 없다.

조심스럽지만 미드 속 현실을 한국에서도 조금씩 체험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2023-06-02 26면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602026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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