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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재정과 건강보험흑자 17조 원
정형준ㅣ녹색병원 재활의학과 과장,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부위원장
정부는 작년 말 무려 40여년 뒤의 재정전망을 발표했다. 이른바 2060장기재정전망이다. 최근 1, 2년 사이의 재정전망도 틀리기 일쑤인 정부가 장기재정전망을 제대로 내놓았을리가 만무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용의 방향성이다. 정부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연금, 건강보험 등 모든 사회복지재정은 심각한 적자 혹은 재정파탄으로 예상된다. 결국 정부의 장기재정전망은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 사회복지재정을 줄이거나 늘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긴축재정의 근거를 위한 ‘맞춤형 전망’ 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반복지적 흉측한 사고는 돈문제로 환원되는 순간, 이상하게도 복지의 원칙과 당위성 그리고 그에 따른 전망이 아니라, 반복되는 재정논리로만 귀착되곤 한다. 재정프레임의 최대 단점은 재정전망의 옳고 그름보다는 누군가 돈을 더 내야 한다는 ‘비용전가’의 프레임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 서비스를 받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일반을 사회복지에 그대로 대입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사실 사회복지는 지불능력에 따른 서비스제공이 아니라, 보편적 서비스제공을 통한 재분배를 목적으로 한다. 시장경제가 부익부 빈익빈의 소득불균형뿐 아니라, 기본소득, 교육, 연금, 의료, 주거 등의 기본적인 사회서비스까지 불균등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복지가 요구되는 것이다. 경제학적으로는 시장이 못하는 것을 정부가 행하는 재분배정책이 복지다. 따라서 복지란 비용지불능력에 상관없는 서비스를 공공이, 그 주체는 정부가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근본적인 원칙을 무너뜨리려 반복지세력은 ‘재정프레임’ 을 주구장창 들이댄다. ‘돈도 없는데 복지를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반복지우파들의 공세에 복지세력들의 대응은 공격적이지 않고 다분히 수세적인 것이 현실이다.
우선 근본적으로 흑자재정은 아니더라도, 균형재정은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경우가 있다. 현실에서 경제상황이 좋고, 흑자재정이 가능한 국면이라면, 균형재정론을 지지하는 사람도 복지확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지만, 경제상황이 어려울 때는 균형재정론을 주장하는 경우에, 추가적인 비용마련을 위한 대안, 즉 돈 마련까지 본인의 머리로 생각하려 한다. 물론 간단하게 생각해서 이것은 일단 복지를 확대하고 발생한 적자분은 재분배적 차원으로 누진적으로 부담한다는 큰 그림만 그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균형재정’의 굴레는 점점 더 많은 변수들과 숫자들을 고려할 필요를 요구한다.
특히 ‘인구절벽론’의 경우 노인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한국에서는 향후 재정프레임에 미칠 영향이 엄청날 듯하다. 노동인구는 줄고, 부양해야 하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구조는 누가 봐도 밝은 전망을 제시하기 쉽지 않다. 여기에 한국이 장기적인 저성장 국면에 들어선다는 전망이 가중되면서 ‘균형재정’의 시각은 ‘복지확대 = 재정확보’ 로 나아갈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특히 반복지세력의 세대갈등론(젊은 세대의 희생으로 연금, 복지 등 노인세대를 부양하게 된다는 논리)에 공감하는 구실이 될 수도 있다.
건강보험은 2009년까지 근근이 재정수지를 맞추고 있었다. 2005년 일시적으로 1조 5천 억정도의 흑자를 기록했으나, 이후 흑자는 지속되지 못했다. 보험요율이 10여 년 간 2배가 인상되었으나 보장성강화도 미미했다. 이 때문에 보장성강화 같은 핵심 의료복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재원마련이 절실했다. 일부에서는 국민들의 보험료를 인상해 보장성을 높이자는 운동이 제기되었다. 기존 사회운동이 주장한 ‘국고지원확대, 기업부담확대’ 주장으론 부족하다는 근거였다. 그러나 내부논리를 더 살펴보면 이는 건강보험 재정내의 ‘균형재정’ 뿐 아니라 국가복지재정 전반의 ‘균형재정’을 상정한 경우였다. 국가 일반회계에서의 지원확대는 타 복지영역의 축소, 혹은 확대를 막는다는 논리가 뒷받침 된 것이다.
그런데 2011년부터 건강보험은 흑자가 되었고 그 흑자는 매년 늘어갔다. 처음에는 1조 원 규모였으나 2013년 3조 원, 2014년 4조 6천억 원, 2015년에도 4조 원이 넘는 무려 6년간 흑자국면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누적흑자는 자그마치 17조 원에 이른다. 1년에 2조 원이면 15세미만 아동의 모든 의료비를 면제할 수 있으며 1년에 3조이면 입원비 본인부담금을 모두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돈이 남았으나, 막상 이 돈을 보장성확대에는 단 한푼도 쓰지 못하고 있다. ‘돈이 있으면 복지확대가 된다’는 막연한 생각은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술 더 떠 정부는 건강보험의 흑자를 빌미로 2016년 만료인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예상금액의 20%)를 매년 평가해서 지원하는 일반회계지원으로 바꾸려 시도 중이다. 일반회계 지원이 되면 건강보험재정은 더욱 취약해지는데 말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보면, 장기적자전망 때문에 흑자를 쓰지 말고 적립해두어야 한다는 논리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적자나 균형재정일 때는 ‘돈이 없어서 복지확대는 불가능’하고, 재정여력이 있을 때는 ‘미래에 돈이 고갈될 테니 복지확대는 불가능’하다는 논리인 것이다. 결국 이런 논리라면 재정학적인 측면에서는 복지확대가 영원히 불가능하다. 만약 건강보험이 적자라도 일단 건강보험 본인부담금의 획기적 축소, 비보험의 급여화, 어린이, 노인 무상의료는 시행하자고 복지운동이 단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성공여부는 알 수 없지만, 좀 더 분명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지는 이미 불평등한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사회정의이며 당위라는 인식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건강보험의 흑자를 둘러싼 논의와 싸움들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복지는 ‘균형재정’의 덫을 과감하게 극복해야만 이룰 수 있다. 경제위기가 계속되고 인구구조 및 소득구조까지 악화되는 상황에서 복지세력이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전략을 세우지 않고선 모두가 바라는 복지를 그 모두의 것으로 돌리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정부는 ‘균형재정’을 이야기 하면서 국민개개인의 부채는 끝도 없이 늘리고 있다. 포대 하나에 2조 원 가량 하는 사드배치까지 거론하고 있다. 개인은 빚져서 살라고 하면서, 나라는 돈이 남아도 안하는 복지, 결국 복지는 ‘균형재정’ 에 따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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