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6일 레프트21(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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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노동자 보험료 선제 인상은 “사회연대” 아닌 양보일 뿐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보험료 우선 인상을 주장한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 참여 인사들이 그동안 언론에 기고한 글을 모아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 시민의 힘으로 출발》을 펴냈다. 

이 책은 ‘시민회의’를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저자들은 ‘시민회의’를 진보진영이 비판한 것을 두고는 피상적으로만 대응한다. 

대표적으로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이 책은 답하지 않는다. 

낸 것보다 더 받기 때문에 양보가 아니고, 노동자가 내는 만큼 ‘법적으로는’ 기업과 국가도 낼 것이므로 손해가 아니라는 게 답변이라면 답변이다.

그러나 보험료 인상에 대한 노동자들의 거부감은 보험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건강보험 제도가 노동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복지 제도임에도 그동안 노동자들의 부담이 부자들이나 기업주들에 견줘 상대적으로 높고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건강보험료가 누진율이 아니라 정률로 부과되고 부자들의 납부 탈루가 너무나도 쉽다. 이명박조차 2002년까지 편법으로 보험료를 2만 원씩만 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민간보험’보다는 낫다는 논리로 이런 문제들에 눈감아 버린다. 건강보험은 소득만큼 내고 필요한 만큼 받는다고 과장한다. 이런 제도들로 “사회연대”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부를 기업주들이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득만큼 내고 필요한 만큼’ 받는 복지 제도란 있을 수 없다.

‘시민회의’가 부러워하는 영국, 프랑스, 스웨덴의 보장성 높은 의료제도는 노동계급이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지 먼저 보험료를 인상하겠다는 식의 ‘사회연대’ 선언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시민회의’는 노동자들의 보험료를 올리는 것을 “혁신적”인 “진보의 패러다임 변화”로 받아들여 달라고 주문한다. 오건호 위원의 말을 빌리면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 대중교통체계 개편으로 정치적 권위를 획득했듯이, 진보운동도 모델 사례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혁신과 패러다임 변화는 자본가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일 뿐이다.  

박형근 교수는 “‘건강보험 하나로’가 현실화되는 것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지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파에게까지 추파를 던지는 듯한 인상을 줘 영 찜찜하다. 

이런 후퇴와 양보를 전제로 한 ‘모델 사례’는 복지 확대의 원동력인 노동자들의 투쟁과 계급의식에 악영향을 줄 뿐이다.

심지어 최근 자유주의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조차 먼저 국가ㆍ기업의 부담으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자고 주장하자 ‘시민회의’의 처지는 궁색해졌다. ‘시민회의’가 민주당과 다른 점이 좀더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의 양보를 주장한다는 점이 됐기 때문이다.

‘시민회의’ 주도자들은 진보진영이 제시하는 다른 대안들을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보험료 우선 인상 철회는 논의할 수 없다고 한다. ‘시민회의’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라는 대의가 아니라 보험료 우선 인상 즉, 노동자들의 양보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보험료 우선 인상을 정당화하는 변명으로 가득 찬 이 책은 ‘시민회의’의 군색한 처지를 보여 준다.<끝>

 

이상헌 ILO 연구조정관(genevelee@gmail.com)

'폴라니의 추' 라는 게 있다. 20세기 중반에 명성을 떨쳤던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는 노동, 토지, 화폐와 같이 상품이 아닌 것을 시장논리에 입각하여 극단적으로 상품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를 위협한다. 경제위기도 그렇게 해서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반드시 파국에 직면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을 규제하고 노동을 보호하려는 제도적 정책적 개입이 생긴다. 역사적으로 노동법이나 복지국가도 그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물론 시장규제가 또 지나치게 진행되면, 이에 대한 반발로 시장주의가 득세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시장근본주의와 극단적 개입주의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한다. 폴라니가 세계 2차 대전 이후까지의 자본주의 역사를 분석하고 내린 결론이다.

2008년 경제위기가 시작되었을 때, '폴라니의 추'가 되돌아오는 역사적 대전환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 경제위기가 명백히 시장의 실패였고 극단적인 시장근본주의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금융시장의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80년대 이후로 진행된 금융시장 규제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와 같은 시장주의적 정책에 기이한 구조적 위기였다. 그 결과 소득 불평등은 급격하게 증가해서 경제효율성조차 위협하게 되었다. 조셉 스티글리츠가 주장했듯이 경제위기는 "불평등의 대가"였다. '폴라니의 추'가 오른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경제위기가 시작된 지 오년이 지났지만, '폴라니의 추'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조짐이 아직 보이질 않는다. '실패한' 시장을 교정하려는 노력이 드물었다. 물론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으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경우가 태반이다. 금융시장을 규제하려는 국제적 정책 공조 노력은 변죽만 올리고 아직 큰 성과는 없다. 국가별로 산발적인 노력이 있을 뿐, 유럽 연합 내에서조차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노동시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의 소득 안정성을 높이려는 정책 노력도 좌초 분위기다. 오히려 복지제도를 공격하는 목소리만 높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위기의 원인도 시장근본주의적 정책이 아니라 "원칙없는 복지주의"라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야말로 주객전도다.

그 결과는 최근 통계지표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경제위기 발발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으나 납세자들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생존했던 금융기관들은 이미 경제 이전의 수익성을 회복했다. 다른 실물 부문은 아직 힘들다. 일반 노동자들의 월급은 삭감되었지만, 금융기관 임원의 연봉은 다시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고 있다. 대기업은 급성장한 이윤 덕분에 현금을 쌓아두고 있지만, 일반 가계는 여전히 빚에 허덕대고 있다. 불평등은 경제위기 동안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 때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경제위기 이후 이윤몫은 전후 최고 수준을 갱신하고 있다. 임금몫은 그만큼 계속 줄고 있다(그림 참조). 불평등 개선을 통해 안정적인 소비수요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건전한' 성장을 도모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모델에 대한 약속은, 현재로는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 '폴라니의 추'가 왼쪽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계속 밀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흥미롭게도 금융부문의 전문가들조차도 우려스러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임금몫은 줄어 소비수요는 상대적으로 감소하지만, 상대적으로 증가한 이윤몫은 소비수요에 대한 불안감으로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앞으로 경제가 빠른 시기에 회복하여 성장하기는 힘들다. 최근에 파이낼셜 타임즈가 "자본이 노동의 몫을 채어갔지만, 승리는 공허할 뿐"이라는 기획 기사를 실은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Financial Times, "Capital gobbles labour's share, but victory is empty", 2013년 10월 14일자). 이 기사는 한 투자은행 관계자를 인용했다. "(이런 추세라면) 자본주의는 자신을 파괴할 씨앗을 뿌린다고 한 마르크스가 결국 옳지 않을까 걱정이다. 소비 수요가 없어진다면 자본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그래서 불안하다.

그렇다면, 이번 경제위기에서 왜 '폴라니의 추'는 움직이지 않는가? 그 해답은 '폴라니의 추'는 '갈릴레오의 추'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갈릴레오의 추는 중력의 힘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이지만, 인간의 경제에는 그런 중력이 주어져 있지 않다. 결국은 사람이 움직이어야 한다. 추를 움직일 사회정치적 세력이 있어야 한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기에는, 새로이 형성된 노동조합과 시민세력들이 폴라니의 추를 움직였다. 뉴딜도 그렇게 나왔다. 유럽의 복지국가도 마찬가지다(물론 2차 대전의 역할도 무시는 못한다). 하지만, 이번 경제위기에는 '월스트리트 점령운동'과 같은 파편적인 움직임 외에는 눈에 띄는 게 없다. 1%의 힘은 더 강고해졌다.

결국 자본주의를 보다 안정적이고 인간적으로 바꾸는 일은 힘의 균형을 새로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금융시장을 개혁하고,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도록 노동시장을 바꾸고, 시민적 권리로서 최소한의 소득 보장을 제공하는 사회보장 제도를 구축하는 것도 힘의 균형 회복에 기초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 일시적 성공이 있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이를 위해 노동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 긴급하다. 특히 노동에 제 목소리를 주는 게 중요하다. 노동에게 발언권이 없으면, 시장주의의 일방통행을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많은 정부들이 그나마 약해진 노동의 목소리를 더 약화시키려고 안달이다. 아예 목소리를 막으려 하는 정부도 있다. 이래서는, '폴라니의 추'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대가는 지금보다 더 혹독할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거대한 추에 맞섰던 존 레논을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건, 노동에게 목소리를 주자는 것일 뿐이다"(All we are saying is give labour a voice). 자본주의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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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Tistory에 Blog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초대장을 보내주신 EUNGENIUS 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제 Blog는 다양한 사진과 글을 소개코저 하지만 일단 사진을 중심으로 하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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